본문 바로가기
건축이론과 도시담론

한국의아파트와단지설계 -한국의아파트가사회에미친영향

by 디씨즈티미 2020. 3. 16.

한국의 아파트가 사회에 미친 영향

-문학적 분석 및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의 아파트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어떠한 인식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계속적으로 언급하던 낯선 서양의 주거문화가 어떻게 이미지 변화를 거쳤기에 이러한 변화를 가졌는가는 굉장히 중요한 분석의 대상이 된다. 1960년 대 이후 대규모로 확산된 아파트와 그 이전까지의 상황에 대해서 만문문화 즉 신문의 만평과 같은 한 컷짜리 시사점을 던지는 매체와 근대소설 혹은 수필 신문기사와 연설문들을 아파트의 이미지에 대한 해석의 이미지로 잡았다.

또한 소설에 나타난 아파트의 이미지 변화가 당대의 다양한 정책적,건축적 논의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다는 점을 객관적으로 구체화히기 위해 일반 전문서 등을 같이 인용 자료로 사용하여 서술 할 것이다.

근대화는 어떠한 이유로 이루어졌는가? 자발적이었는가? 흥선대원군이 실질적으로 통치했던 조선 말기는 근대화가 강제로 개방되었다. 많은 열강과 특히 일제의 강압에 의해 우리는 을사늑약에 도장을 찍고 난 후 근대화의 산고를 겪었다. 상향식 구조의 변화 즉 시민의 쿠데타와 시민 혁명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신분제가 해방되어 버린 (하향식 구조에 의해 갑오개혁등) 일본의 명치 유신 즉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받아 서양을 무조건 적으로 모방하는 행위를 그냥 우리도 답습할 뿐이었다. 이는 메이지 30년대부터 생활개선운동(서양식으로) 주택을 서양식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와 주택개량 박람회에서 주택의 이상상에 대해서 서양식 주택양식을 적극적으로 표출 했다는 것으로 볼 때 우리도 서양식 주택 양식을 우리의 어떠한 희망보다는 일본에 의한 시대정신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는 일본 본토 뿐만 아니라 새로 지어진 한국인 주택들도 평면이나 내부가 대폭 일본이 문화주택(흔히 말하는 문화의 고급성적인 의미)로 도입되었다. 1930년의 박람회에서 출품된 3동의 시범주택을 모델하우스처럼 활용한 집들도 있었다.

일본에서 도입된 문화주택의 용어와 개념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었으며 조선인 상류층과 일본인들이 향유하던 주거 문화가 되었다. 근대적인 생활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는 정책적인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적인 부분이 있었다.

1934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식민지 시대의 소설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일본유학을 다녀온 작중 주인공 엘리트 구보는 세살 연상인 그의 친구 누이를 사모하면서 상상하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에서 결혼 비용 삼천원 신혼여행은 동경으로 관수동에 그들 부처를 위하여 개축된 집은 행복을 보장하는 듯 싶었다.는 내용으로 관수동의 개축된 집에서 일제강점기의 문화주택과 이를 모방했던 아류에 대해서 굉장한 염원을 보인다.

문화주택에 대해서 만문문화는 굉장히 사치스럽고 어차피 수탈 당한다는 인식적인 경향을 드러냈으나 상대적으로 문화주택에 대해서 반대로 염원하는 대중들의 모습들이 이렇게 문학에 대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후 상류층을 위해 지어졌던 개량한옥은 1941년 조선주택영단의 설립으로(현재의 lh로 보면 된다) 마치 학교 표준 설계를 내놓은 일본의 모델을 받듯이 주택 표준형 설계에 의해서 영단주택은 일제강점기의 주요한 주택형식으로 자리잡는데 이는 1952년 해방과 6,25를 거친 한국에 대한주택공사로 전환되었으며 이후 한국의 주택난 해결을 위한 주택의 대량생산과 표준설계에 의한 아파트의 전국적 보급 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 이것이 곧 기원점이 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5가지의 표준설계도를 작성하였는데 계층별로 나누어 보급하였다. 갑부터 무까지 나타냈는데(영어로 본다면 a부터 e 타입) 갑과을은 일본인들을 위한 단독주택 병은 한국인 노무자들을 위한 하류서민적인 주택 지금의 social housing 정과 무는 하류서민과 노무자들을 위한 주택으로 규정되었다. 정과 무 부터는 임대로 그 이상에서는 분양제도를 도입하였다.

영단주택은 4차년도 사업까지 진행하게 되었는데 6,25 전쟁을 거치면서 외국의 원조자금으로 재난을 위한 응급 구호주택으로 변화되었으며 1957년을 기준으로 대한주택공사는 5-15평 사이의 단독주택 건설에 치중하였다. 1956 417일에 발행된 대한건축학회지 건축 제2호에서 주택특집을 기획하여 당시 서울특별시장인 김태선을 비롯하여 치안국장과 여류시인, 여류예술가 등 8명이 인터뷰 한 내용을 담았는데 이는 영단주택의 일면 등을 파악 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었다.

응답내용 중 희망 주택에 대한 응답자 중 5명은 문화주택을 나머지 3명은 한국식과 문화식의 절충 그리고 4명은 아파트 건설을 주택난 해결의 유용한 방법으로 제안했다는 것이다. 아파트 공화국에서도 나와 있듯이 서구식의 생활을 담아 낼 수 있는 서구형 주택은 재래의 주택형식과 내용이 매우 불합리적인 것에 비교하여 희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단주택의 입주희망자가 적은 것은 아파트 건설을 추진한다는 대응 방안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당시에는 아파트가 인기가 없었다라는 많은 학자들의 통념과는 다른 반응이다.

아파트의 공급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구호주택의 일환으로 지어진 단독주택의 부실한 시공과 정부주도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담긴 주택부문 정책기조, 그리고 정부의 대북 전시 정책 혹은 대내 안보정책을 지원한 일부 사회지도층의 대중계몽적 견해 등이 결합하며 나타난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주택공사가 정부의 독려로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마포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면서 아파트가 대중적으로 선호되지 않은 이유를 자기 소유의 땅과 정원의 부재로 보며 서울 수유리에 연립주택 26호를 건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아파트에 대한 적극적으로 변화하기 위해 대규모 공간에 새로운 설비시스템을 적요하여 마포아파트를 건설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그 당시 내부의 기술은 석탄으로 엘리베이터도 부재한 공간을 설계하였다는 것에서 큰 변화를 이룩하려는 첫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아파트는 1956년 주식회사 중앙산업에 의해 건설된 중앙아파트가 최초의 아파트라고 볼 수 있다. 아파트는 신문물 혹은 콜롬버스의 신대륙 같은 완전 새롭고 특이한 것이었다. 그 당시 건설된 토지인 주교동 사람들은 몇 백년을 살려고 이렇게 짓느냐 누가 살 건데 이렇게 짓느냐 등의 호기심을 지녔다고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보러 왔다는 점 등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하였다.

이후 마포아파트는 소위 사회 상류층 인사를 위한 주택으로 대중들에게 꿈의 주택과 문화주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이야기 했던 내용이 이를 많이 알아 볼 수 있는데 5,16혁명은 우리 한국국민도 선진국의 국민처럼 잘 살아 보겠다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중략 이제까지 우리나라 의식주 생활은 너무나도 비경제적이고 비합리적이었습니다등의 이미지를 통해서 문화시민화를 추동하기 위한 모델하우스 즉 전시장의 역할을 마포아파트가 전국적으로 아파트라는 주거 양식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

아파트가 이렇게 그 전신이 임대주택의 성향을 보이다가 이후 마포아파트를 통해서 큰 인식변화를 지니는데 선망의 대상이 되는 아파트 공간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시청하였던 영화중 high-rise라는 고층빌딩에 대한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을 봤을 때도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누군가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선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아파트는 분명히 문화적으로 계몽된 주거 양식이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포아파트 건설을 통해서 아파트 건설은 대중화된다는 것이 순탄치는 않았다. 사실 정책적으로 주도되었지만 아파트는 긍정적이거나 크게 확산되지 못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는데 상류층이나 사회지도층 혹은 아파트 생활을 경험한 이들이 대중매체를 통해서 아파트 생활을 간증하는 것이 마치 봇물 터지듯이 발표 되기 시작하자 변화를 하기 시작했다. 일년 내내 더운 샤워로 피곤을 풀며 먼지에 싸인 몸을 녹이면서 아파트에 사는 즐거움을 흥얼거릴 때가 한 두번이 아니며 아파트 자체에 설비되어 있는 목욕조, 웨스턴 토일렛-양변기 따위의 응접실 키친에서 직접 던질 수 있는 쓰레기통, 그릇을 굉장히 효율적으로 닦을 수 있는 싱크대 등 아파트 공간과, 토지이용효율을 장점으로 대중적으로 전파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선전적인 인용문들을 이야기 한 까닭은 당시에 근대화에 의한 산고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근대화를 인정한 것이 아니다. 이호철의 세태 소설 소설은 만원이다에서 마포아파트가 서 있는 도화동이 저렇게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 한강이 흘러가고 오른편으로 공덕동이 마주 있고, 철길 건너로는 신공덕동 만리동이 이어지고 벼랑 밑으로 들고 나오는 당인리 발전소로 가는 서울 같지 않은 풍경에 대한 묘사는 대중들에게 아파트는 생활혁명을 이루는 대상이었을 뿐 부정적이지도 현실적이도 아무런 느낌을 주지도 못했다.

1970년대 아파트가 총 주택수 중 0.77%였다는 것은 이를 반증하는 사례이다. 당시 주택에 실렸던 수기에서 아파트로 이사간 첫날 저녁 나는 밥상 위에 일거리를 펼쳐논 아빠를 가로막고 앉아 밤새도록 이야기를 강요할 만큼 기뻤다.(중략)…. 우리 소유의 아파트를 가진 즐거움이 있기는 했지만 그 상태에서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라는 것에서 대중의 이상적인 주거 양식은 아파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궁극적인 주택형으로서 아파트가 되지 못했던 이유는 1962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설립된 대한주택공사가 처음에 저렴한 대량 생산기술에 의한 주택공급의 확대가 저소득층의 주택이라는 이미지를 주었고 1960년대에 증가한 수도권의 인구 가운데 절반이 빈민층에 속하는 계급이었다. 특히 이들이 살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면서 지어졌던 시민아파트가 그 대체주택이었다는 점에서 아파트는 저소득층의 주택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고착하게 만들었다.

이후 아파트 주택과 도시서민의 등가적 이미지가 깨지는 결정적 계기는 와우아파트 붕괴와 광주 대단지 주민소요 사건인데 와우동 시민아파트 붕괴사건과 1971년 광주 대단지 주민소요 사태는 시민아파트 건설계획의 백지화를 추동하였고 급격한 사회적 불안요인으로 작용된 두 사건은 아파트가 중산층을 대상으로한 주택형태로 바뀐다. 이러한 이유 외에도 고등교육을 받은 신중간층 도시민의 편리성 추구에 따른 아파트 선호도 증가와 투기수요의 증가, 국가주도적인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착수에 따른 주택부문 투자 여력의 상대적 부족과 후순위로의 퇴조 및 민간부문에의 의존성 확대 등은 중,고소득층 가구를 대상으로 한 아파트 수요를 부추기게 만든다.

이후 정책적으로 공공의 임대 아파트 건설이 아니라 프리미엄 아파트 등이 등장하는데 이는 민간아파트 개발을 자극하였다. 주택공사가 건설한 아파트는 과거의 시민아파트 평균규모인 8평에서 18평에서 40평까지 확대되고 민간아파트의 경우 70평에 이를렀다. 반포의 경우 복층형 아파트가 생겨난다.

이후 아파트는 중산층이 선망하는 주택이 되었고 단지의 규모가 확대되고 수영장 등의 시설의 제공으로 대단위 아파트단지는 중산층의 집적된 주거지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최초로 모델하우스를 통해서 단순히 주거 모듈만을 바라보고 왜곡된 편향된 주로 긍정적으로 편향된 자극을 받게 된다. 모든 재료 등이 고급재로 마감화된 아파트는 내부공간 중심의 생활공간 인식을 가지는 아파트를 선호하게 된다. 특히 이는 외부공간에 대한 질적 수준이나 근린과의 친교관계 등을 위한 공용공간이나 공공공간을 자신의 생활공간으로 편입시키지 않는 왜곡된 주택관의 형성에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조정래의 비탈진 음지는 반대로 도시화 과정에서 고향을 등진 상경자들에 냉소적 경이를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처음 이 아파트촌을 먼발치에서 보고는 무슨 공장들이 저렇게 한 군데에 빽빽이 한 군데에 빽빽이 몰려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공장이라 하더라도 그 숫자가 너무 많았고, 지나치게 깨끗했다. 그럼 학교일가? 학교라면 무슨 학교가 잇대어 있지 않고 토막토막 떨어져잇단 말인가? 그리고 역시 그 건물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차옥? 그 많은 서울 사람들이 먹고 사는 쌀을 넣어두는 창고?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이 사는 아파트라는 이름의 집인 것을 알고 그만 깜짝 놀랐던 것이다. 1,2층도 아닌 5층이나 6층의 높은 건물에 층층이 사람이 산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살림을 하고 산다는 것이었다. 머리 위에서 불을 떼고 그 머리 위에서 또 불을 떼고 오줌 똥을 싸고 그 아래에서 밥을 먹고 그러면서 자식을 키우고 또 자식을 낳고 사람이 사람위에 포개지고 …. 어찌됐건 서울사람이란 징상스러운 인종들이었다.

중상층의 이미지는 서구식 고등교육을 받은 그 당시 30대의 젊은 세대를 사이에 아파트가 선호 되었다. 아파트라는 게 단독주택에 비해 편리하고 편안하고 취향과 선호를 정확히 타겟팅한 early adoption적인 작용을 한 것이다. 서성란의 겨울손은 시골 중소도시에 자리한 자신의 불편하고 남루한 시댁의 주거 환경과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대비하면서 아파트 공간의 편리성에 위무되는 풍경을 잘 묘사하였다.

아파트에 대한 이미지는 계층적 위화감을 조성하였다. 이는 중산층 이하의 사회계층과 중산층을 나누는 대중적 방법으로 작용하였다. 이순원의 장편 소설 스물 셋 그리고 마흔 여섯에는 아파트로 인한 사회의 계층의식의 얼마나 보편적으로 대중들에게 자리하고 있었는가를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새로 지어진 아파트를 보며 중산층의 성공의 삶은 국산승용차와 새로 지어진 아파트 보유라는 것이었다.

1971년에 발표된 최인호의 소설 타인의 방은 도시형주택으로서의 아파트가 야기하는 고독과 소외 그리고 폐쇄적인 방이 주는 안온함과 피곤함을 상징하는 거리를 대비하면서 익명과 폐쇄의 공간으로 아파트를 상징하고 있다. 심한 고독을 느끼고 벌거벗은 체, 스팀 기운이 새어나갈 틈이 없었음으로 후텁지근한 거실을 잠시 철책에 갇힌 짐승처럼 신음을 해가면서 거닐었다. 가구들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게 너저분하다. 무의미한 시간의 회복과 반복을 해가고 있다라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아파트의 고독성을 표했다.

1970년대 부동산 폭등은 아파트로 인한 가족의 해체 또한 이미지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는데 김숙의 작품 오래된 붉은 벽돌집에서 남편에게 뿌리내리지 못한 제가 먼저 집에 목숨을 걸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끊임없이 새 집을 찾아 헤매는 저를 견디지 못한 남편이 먼저 바깥으로 나돌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언제부터 남편의 손을 씻는 일을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45평짜리 아파트가 제 앞으로 떨어진 날부터였을 것입니다. 중략 새 집을 손에 넣을 때마다 이제 더는 부유하지 않고 그 집에 닻을 내리리라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더 이상 집을 짓지 않는다면 모를까, 더 비싼 집 더 화려한집에서의 유혹은 제 심신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절집에서 자라 공간의 소외와 또래문화 집단과의 공간적 사회적 격리를 겪은 화자의 말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격리는 사람들에게 상반된 인식을 보이는데 욕망, 과밀에 의한 소음집적과 익명성의 강화를 이끌엇다. 1990년대 초기 부동산 안정대책은 적극실시 되었고 이로 인해 강화 기준이 점차 올라갔지만 아파트 단지의 고밀화와 초고층화는 걷잡을 수 없어졌다.

아파트의 투기성이 다른 생활성의 가치를 짓눌렀다 이유는 재개발 EEOANS이었다. 공선옥의 소설 <한데서 울다>는 직설적으로 이를 표현하였다. 아파트는 온통 소음의 도가니였다. 남편은 좀 시끄러우면 어때라고 말했다. 집 없는 것보다 낫지라고 했다. 처음에는 남편의 말에 수긍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것이 아니었다. 견딜 수 없이 화가 끓어오르기도 했다. 내가 이런 집ㅈ구석을 마련하려고 그 고생을 했던가 싶어서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이처럼 과밀의 아파트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소음이나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소음이 견딜 수 없는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이는 한해 동안 발생하는 공동주택에서의 이웃간 분쟁에서 소음발생에 따른 불편의 호소가 단연 수위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객관성을 입증 할 수 있다. 필자도 유아 시절 아파트에 살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밑집에서 사시는 아주머니 때문에 항상 갈등을 빚었던 시절이 생각난다.

아파트는 과거에 토끼장 혹은 성냥갑이라고 직설적이고 표현되는 것이 고밀화 과정에서 가치중립적인 차원이 아니라 훨씬 부정적이게 여겨지게 되었다.

그 매듭은 누가 풀까는 이를 잘 묘사해놨다. 운전식 차장을 열고 한 팔을 창턱에 얹은 하영은 습관적으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서 차 댈 곳을 찾다가 불현듯 정차를 했다. 거대한 침묵의 조형물 사이에 갇힌 갑갑증 같은 증세가 갑자기 그 여자를 숨막히게 했던 것이다. 기다랗게 줄지어 놓인 자동차들은 주검 같고, 그 사이에 마지못해 남겨둔 것 같은 인색한 길바닥은 비좁고 어두워서 아무 쓸모도 없어 보였다.

1970년대에 무작정 상경한 노인의 눈에 공장이 아니면 학교 혹은창고 등으로 언급되던 아파트가 이처럼 사회적인 절연체의 표상으로 전이되어 묘사되고 있으며, ‘잔뜩 발기한 것처럼 여기 저기 솟아있는 아파트 덩어리는 다시 거대한 난수표가 된다라는 등의 표현을 통해 부정적인 욕망의 응어리인 동시에 사회적 절연체를 뜻하는 부정적 익명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이렇듯 아파트는 근대화를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그 아파트 문화 자체가 무조건적으로 성공한것이성공한 것이 산고를 겪엇다 소음과 격리현상 등은 특히 배제 할 수 없는 아파트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특히 재개발 중심의 사고에서 아파트는 주변 지역과 양극화 된 계층 분리적인 공간이 되는데 이로서 공간은 polarization 즉 양극화 현상을 야기한다. 주변의 침체된 원도심 위주에서 재개발 하여 초고층화된 아파트를 건설하게 되면 이러한 아파트가 블록화 되어 주변과 전혀 다른 공간을 야기한다. 즉 유형론 적으로 연결된 양식의 도시의 조직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도시성적인 측면을 파괴시킨다. 이는 어느 공간을 가든 한국의 도시에서는 특징적인 공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러한 양극화 현상은 아파트 단지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자신들만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아파트 매스 자체를 담벽으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차단하는 social exclusion현상을 보인다.

La의 공간 양극화 현상을 설명하였던 마이클 데이비스라는 역사학자의 책 la fortress의 모습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 한국의 아파트를 중심으로한 공간적 양극화 현상이다. 특히 아파트 단지 설계를 할 경우에 아파트 단지에서 특정 부분은 임대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야 할 경우 임대주택을 이용하는 이들은 아예 단지에서 배제시키는 모습의 단지를 설계한다. 따로 놀이터를 떼어버리고 출입구도 다르게 만든다. 그리고 연속된 아파트 단지촌에서 어느 아파트를 사는가는 학창시절 많은 아이들의 슬픔을 자아내게 만들었던 요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파트의 이웃에 대한 개념의 모호성과 익명성 등을 없애기 위해서 새로운 아파트를 만들기도 한다. 아파트는 과거 서로 부대끼며 살던 것 자체를 싫어하게 된 한국 사람들에게 익명성과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현대 한국인들의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한 공간이다.이러한 소통의 부재와 단지 내 소통의 부재에 대해서 해결하기 위해서 아파트는 공유 공간 혹은 집 안 내 공유 공간 확보에 주력한다.

E 편한세상에서 제시한 D·House Life, 84m²은 소통의 공간, 다이닝 룸으로만들다라는 컨셉으로 설계된 아파트 공간이다. 라이프스타일이 구조에 의해서 굉장히 획일화 된 것에서 ㅂㅓㅅ어나려고 다이닝룸을 통해서 소통의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기존의 아파트 구조에서 가족 구성이 방문을 닫고 저마다의 시간을 즐기는 것에서 구심점을 만든다는 것이다.

ㄷ 자형 구조의 아파트를 만들어서 주방을 효율적으로 만들고 대면형 주방을 제공해서 커뮤니티성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한화건설 아파트 디자인 새 콘셉트 'S-low'

= 한화건설은 꿈에그린 아파트의 새 디자인 콘셉트로 '에스로우(S-low)'2010년 공개하였다. 에스로우에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여유로운 '슬로우 라이프(느린 삶)'를 제공하려는 디자인 철학이 담겨 있다고 회사 측은 소개했다. 한화건설은 '자연과의 교감'이라는 콘셉트로 아파트 엘리베이터와 각 가구 사이의 공용공간에 전원주택 형식의 마당을 두기로 했다.

       

 

아파트의 다양한 트렌드가 생겨나는 것은 아파트에 가치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제 Quantity to Quality라는 질적소비적인 요소가 커졌다. 아파트라는 공간이 단순히 부동산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 말고도 살아가는데 편리함을 누리기 위해서 많은 요구가 생겨났다.

그래서 앞서 언급된 여러 가지 컨셉으로 건설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아파트의 형태가 아닌 프로그램등을 개발하였다. 과거에는 사회적으로 아파트의 가격과 부동산적인 가치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3차원적으로 아파트의 천장고가 얼마인가도 중요하게 되었다. 경기도 안양 평촌신도시에서 공급한 ‘힐스테이트 범계역 모비우스’가 대표적. 층별로 천장 높이를 2.4~3.0m까지 차별화한 상품을 내놔 수요자 호응이 좋았다. ‘힐스테이트 판교 모비우스’ 역시 기준층 천장 높이는3.0m이지만 1층은 3.6m까지 획기적으로 높였다

빨래,음식 문화의 전환도 생겼다 주거는 인간의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가사 공간의 트렌드도 변하였다. 수 년전 김치냉장고의 등장으로 아파트 세대 내 주방 동선(動線)과 배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건설사들이 표준 평면을 대대적으로 바꾼 적이 있다. 새로운 가전제품이 내부 공간까지 변화시킨 것이다. 최근에 새로운 아이템이 눈에 띈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창문을 열기 어려워지면서 빨래건조기가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 대표적. 이제는 세탁기에서 꺼낸 무거운 빨래를 남향 건조대로 옮겨 말리는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빨래건조기 구비가 필수인 외국인용 임대주택 수요 증가 추세도 한몫한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함께 쓸 수 있도록 충분한 면적의 세탁실이 세대 내 적절한 위치에 배치되도록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또한 실내체육관과 스카이라운지까지도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과거에는 ready made의 공간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맞춤형 평면으로 진화하였다. 하지만 280가구 규모인 힐스테이트 판교 모비우스에는 20가지 평면 타입이 선보여 눈길을 끈다. 같은 타입에서도 침실 3개에서 1개까지 가족 수와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선택이 가능하다. 자녀들이 출가한 노부부가 주택 다운사이징을 할 경우, 방 개수를 줄이는 대신 거실을 넓힐 수 있도록 가변성을 높인 것이다. 신혼부부나 스타트업 사무실로 쓸 젊은 층에게도 다기능 맞춤 공간이 된다집안 내부 골조만 지어 분양해 내부 인테리어를 입주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한 ‘골조 분양 아파트’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추진한 골조 분양 아파트는 내부 마감을 생략하는 방식으로 입주자가 직접 내부 인테리어를 시공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아파트에서 청소,식사제공 등 서비스 수요가 증가하는데 과거에 서양의 아파트에서는 실제로 부엌공간까지 공유하고 음식을 작은 엘리베이터 등을 통해서 배달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지금은 이러한 요구들도 생겼다.  2017년 갤럽조사 결과, 일상에서 누군가 대신해주기를 바라는 1위는 청소서비스였다. 시간이 부족한 맞벌이뿐만 아니라 대청소, 이사청소 등 실제 주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3위를 차지한 피트니스센터PT와 여가프로그램제공 서비스의 인기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식사제공 서비스도 눈에 띈다. 올해 입주 예정인 경기 용인시 ‘기흥역 파크 푸르지오’와 ‘힐스테이트 판교 모비우스’ 단지 내 상가는 식품전문기업인 SPC-GFC의 식음료 서비스인 ‘쉐어키친(Share kitchen)’을 제공할 예정이다. 쉐어키친은 맞벌이 부부와 은퇴 부부가 증가하는 사회 현상을 고려해 주부들의 식사 준비 부담을 덜어주면서 매일 다른 건강식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취지다.

 

물론 이러한 아파트 유형은 서민적인 아파트는 아니다. 하지만 아파트에 대한 요구는 점점 바뀌고 있다. 이는 사회적으로 아파트가 고정적인 주거 양식이 됨에 따라 불만과 요구 등을 들어주기 위해서 건설사들도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댓글